법률가이드

DOMO Legal Guide

"그 말만 믿고 도장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전부 거짓이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한 뒤에야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 계약을 없던 일로 할 수 있을까"입니다. 우리 민법은 이런 상황을 위해 사기나 강박으로 인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민법 제110조). 다만 '속았다는 느낌'만으로는 부족하고, 법이 말하는 기망과 강박에 해당해야 하며 정해진 기간 안에 행사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 요건과 실제 절차를 정리합니다.

속아서 한 계약은 '무효'가 아니라 '취소'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기당한 계약이니 애초에 효력이 없는 것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법은 다르게 봅니다. 사기나 강박에 의한 계약은 그 자체로 무효가 아니라, 속은 사람이 '취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비로소 효력을 잃습니다. 취소하기 전까지는 유효한 계약으로 취급되어 대금 지급 의무나 인도 의무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취소권을 행사하면 그 법률행위는 처음부터 무효였던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즉 계약 시점으로 시계가 되돌아가고, 이미 주고받은 것이 있다면 서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계약은 유효한 상태로 확정되어 갑니다. 그래서 '취소하겠다는 의사를 언제, 어떤 방법으로 표시했는가'가 이 사건의 승패를 가르는 첫 관문이 됩니다.

참고로 강박의 정도가 극단적이어서 의사결정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의사표시라면, 법원은 이를 취소 대상이 아니라 아예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고, 실무에서 문제 되는 대부분의 사안은 '취소'로 해결됩니다.

사기에 의한 취소 — 어디까지가 법이 말하는 '기망'인가

사기를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려면 대체로 다음 요소들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 기망행위: 상대방이 사실과 다른 말을 하거나 중요한 사실을 숨겼을 것

  • 기망의 고의: 상대를 착오에 빠뜨려 의사표시를 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

  • 위법성: 그 기망이 거래 관행과 신의칙에 비추어 허용될 수 없는 정도일 것

  • 인과관계: 그 기망 때문에 착오에 빠졌고, 그 착오 때문에 계약을 맺었을 것

여기서 실무상 가장 자주 다투어지는 것이 위법성입니다. 법원은 상품의 선전이나 광고에 다소의 과장이나 허위가 섞이더라도, 그것이 일반 상거래의 관행과 신의칙에 비추어 용인될 수 있는 정도라면 위법한 기망으로 보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이 물건이 최고입니다", "지금이 제일 쌉니다" 같은 판매자의 주관적 평가나 통상적 세일즈 문구는 여기에 해당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가격·수량·품질·용도처럼 계약의 핵심을 이루는 사실을 구체적인 숫자나 서류로 꾸며서 제시한 경우에는 허용 범위를 넘은 기망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큽니다. 예를 들어 매출 자료를 조작해 보여주며 가게를 넘긴 경우, 존재하지 않는 인허가를 받았다고 속인 경우, 담보로 잡힌 사실이 없다고 단언한 경우 등이 그렇습니다. 결국 '주관적 평가에 관한 말'인지 '객관적 사실에 관한 말'인지가 첫 번째 갈림길입니다.

말하지 않은 것도 기망이 됩니다 — 고지의무 위반

기망은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래상 마땅히 알려주었어야 할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한 경우에도 기망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법원은 거래의 성질과 신의칙에 비추어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계약을 맺지 않았을 것이 명백한 경우, 이를 고지할 의무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무에서 고지의무가 문제 되는 전형적인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부동산 거래: 건물의 중대한 구조적 하자, 누수, 권리관계상의 분쟁, 계약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만드는 법령상 제한 등을 숨긴 경우

  2. 영업 양도: 실제 매출·영업이익, 임대차 조건 변경 예정, 인근에 곧 들어설 경쟁 점포 등 수익성에 직결되는 사정을 숨긴 경우

  3. 금전 거래·투자: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채무 상태나 자금의 실제 사용처를 숨긴 경우

다만 모든 정보를 다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스스로 조사하면 쉽게 알 수 있었던 사항이거나, 계약의 중요 부분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정까지 고지의무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 사건에서는 "그 사실이 계약 체결 여부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사항이었는가"를 자료로 설득하는 작업이 핵심이 됩니다.

강박에 의한 취소 — 겁을 주어 받아낸 서명

강박은 상대방에게 해악을 가하겠다고 알려 공포심을 일으키고, 그 공포심 때문에 의사표시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기와 마찬가지로 고지된 해악이 '위법'해야 합니다.

여기서 자주 생기는 오해가 있습니다. 고소·고발하겠다거나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말한 것 자체는 원칙적으로 정당한 권리행사이므로 위법한 강박이 아닙니다. 법원은 다만 그 권리행사가 목적이나 수단에서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범위를 넘어선 경우, 예컨대 실제 권리와 무관하게 부당한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된 경우에는 위법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강박을 주장할 때는 다음을 중심으로 사실관계를 정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 누가, 언제, 어떤 내용의 해악을 어떤 방식으로 고지했는지(통화 녹음·문자·메신저 기록)

  • 서명 당시의 시간·장소·동석자 등 정황(심야, 밀폐된 장소, 다수의 위압적 동석 등)

  • 계약 내용이 통상적 거래에 비해 현저히 불리한지

  • 강박 상태가 사라진 직후 어떤 행동을 했는지(즉시 항의·신고 여부)

나를 속인 사람이 계약 상대방이 아닐 때 — 제3자의 사기

중개인, 소개해 준 지인, 상대 회사의 직원이 아닌 외부인이 속인 경우는 취급이 다릅니다. 민법 제110조 제2항은 상대방 있는 의사표시에 관하여 제3자가 사기나 강박을 한 경우,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 한하여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한 상대방까지 갑자기 계약을 잃게 하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유형에서는 "제3자가 속였다"는 점만으로는 부족하고, 계약 상대방이 그 기망 사실을 알았거나 조금만 주의했으면 알 수 있었다는 점까지 주장·입증해야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상대방의 대리인이거나 계약 체결 업무를 사실상 맡아 처리한 사람이라면 '제3자'가 아니라 상대방 측으로 평가될 수 있어, 이 제한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사건에서는 속인 사람이 어느 쪽 사람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결론을 좌우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한계가 있습니다. 민법 제110조 제3항은 사기·강박을 이유로 한 취소는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고 정합니다. 예를 들어 속아서 부동산을 넘겼는데 그 사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를 다시 매수해 등기를 마쳤다면, 취소를 이유로 그 사람에게서 부동산을 되찾기는 어렵습니다. 취소가 늦어질수록 원물 회복의 길이 막힌다는 뜻이므로, 사기를 알아차렸다면 즉시 처분금지가처분 등 보전조치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어떻게 취소해야 하는가

행사 기간 — 민법 제146조

취소권은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 법률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 내에 행사해야 합니다. 여기서 '추인할 수 있는 날'은 취소의 원인이 사라진 때, 즉 사기의 경우 속았다는 사실을 안 때, 강박의 경우 그 상태에서 벗어난 때를 의미합니다. 이 기간은 소멸시효가 아니라 제척기간이어서 중단이라는 개념이 없고, 기간이 지나면 그대로 권리가 사라집니다. "일단 지켜보자"가 가장 위험한 선택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행사 방법 — 상대방에게 도달해야 합니다

취소는 소송을 통해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확정되어 있다면 그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취소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중에 다툼이 생길 것에 대비해 내용증명우편으로 보내 도달 사실과 시점을 남겨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내용증명에는 계약의 특정(일자·당사자·목적물), 기망 또는 강박의 구체적 내용, 취소한다는 명확한 의사, 이미 지급한 금원의 반환 요구와 기한을 담습니다.

주의 — 나도 모르게 '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속은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이의를 남기지 않은 채 계약대로 행동하면, 계약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잔금을 마저 지급하거나, 상대에게 이행을 청구하거나, 그 계약으로 얻은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담보를 제공하는 행위 등이 대표적입니다. 부득이하게 이행을 계속해야 한다면 "취소권 행사 및 반환청구 권리를 유보한다"는 취지를 반드시 서면으로 남겨두시기 바랍니다.

취소한 뒤에 남는 문제 — 원상회복·손해배상·형사고소

취소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실제 목표는 대개 '지급한 돈을 돌려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당이득반환

취소로 계약이 처음부터 무효가 되면, 상대방이 받은 금원은 법률상 원인 없는 이익이 되어 민법 제741조에 따라 반환 대상이 됩니다. 내가 받은 물건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사기 사실을 알고 있었던 악의의 수익자라면 받은 이익에 이자를 붙여 반환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손해배상

사기·강박은 그 자체로 위법행위이므로, 민법 제750조에 따른 손해배상도 함께 청구할 수 있습니다. 실무상 계약을 취소하고 원금 상당액을 부당이득으로 청구하는 방법과, 계약은 유지한 채 속지 않았더라면 입지 않았을 손해를 배상받는 방법을 비교해 유리한 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목적물의 현재 가치, 상대방의 자력, 입증 자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형사고소의 병행

기망의 정도가 형법상 사기죄에 이를 정도라면 형사고소를 함께 검토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형사절차가 진행된다고 해서 돈이 자동으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회수를 원한다면 상대방의 부동산·예금·채권에 대한 가압류 등 보전조치를 먼저 해두고, 민사 청구를 병행하는 것이 실효적입니다.

준비해 두면 좋은 자료

  • 계약서, 약정서, 영수증, 계좌이체 내역 등 거래 관계 서류

  • 계약 전후의 대화 기록(문자·카카오톡·이메일·통화 녹음)과 상대가 제시했던 자료 원본

  • 상대의 설명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객관적 자료(등기부등본, 인허가 조회 결과, 실제 매출 자료 등)

  •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을 특정할 수 있는 자료 — 제척기간 기산점 다툼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계약서에 "이후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도 취소할 수 있나요?

그런 문구가 있다는 사정만으로 취소권이 곧바로 없어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기·강박으로 계약을 맺게 한 사람이 그 계약서의 부제소 조항을 들어 책임을 면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별 사안에서 조항의 문언과 체결 경위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조항 문구와 협상 과정을 함께 검토받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물건에 하자가 있는 경우, 하자담보책임이 아니라 사기 취소를 주장해도 되나요?

두 제도는 요건과 행사 기간이 다릅니다. 하자담보책임은 매도인의 고의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행사 기간이 짧고, 사기 취소는 상대방의 기망과 고의를 입증해야 하는 대신 기간이 상대적으로 깁니다. 실무에서는 담보책임 기간이 지난 사안에서 사기 취소나 착오 취소가 실질적인 구제 수단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사실관계를 놓고 어떤 구성이 유리한지 함께 검토하게 됩니다.

이미 상대방이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방법이 없나요?

새로 취득한 사람이 사정을 모르는 선의의 제3자라면 그 사람으로부터 물건을 되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속인 상대방에 대한 부당이득반환 또는 손해배상 청구는 그대로 가능합니다. 다만 상대방에게 재산이 남아 있어야 실제 회수가 되므로, 가압류 등 보전처분을 서두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법무법인 도모가 함께하겠습니다

사기·강박에 의한 계약 취소 사건은 "속았다"는 억울함을 법이 요구하는 기망·위법성·인과관계라는 언어로 옮기고, 그것을 자료로 증명하는 작업입니다. 여기에 제척기간, 추인으로 오해될 행동, 선의의 제3자 문제까지 얽혀 있어 초기 대응이 늦어질수록 선택지가 급격히 줄어듭니다. 계약 이후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되셨다면, 취소 통지를 보내기 전에 먼저 자료를 정리해 상담받으시기를 권합니다. 법무법인 도모가 사실관계 정리부터 취소 통지, 보전처분과 소송까지 함께 검토하겠습니다.